안동 태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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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 태사묘는 고려 개국에 공헌한 김선평, 권행, 장정필 삼태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고려 초 안동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고려 건국 후 중앙 정부는 지방 세력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태조 진전과 지역 수호신 숭배 사당을 설치했는데, 안동 태사묘 건립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930년 병산 전투에서 삼태사의 활약으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승리하며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고, 안동 지역은 고려에 귀부하여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안동 태사묘는 숭보당, 동·서재, 안묘당, 사당, 보물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향사에는 세 성씨 후손들이 참여하여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총회를 통해 태사묘 운영 관련 안건을 논의하고 음복례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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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태사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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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문화재 정보 | |
이름 | 안동태사묘 |
로마자 표기 | Andong Taesamyo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15 |
지정일 | 1974년 12월 10일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태사길 13, ,24-1 (북문동) |
면적 | 4,035m2 |
문화재청 ID | 23,0015000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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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립 시기와 배경
삼태사 서거 이후, 고려 초 지방 제도가 정비되고 지방 사회에 대한 조정이 진행된 성종대나 현종대로 짐작된다. 중앙 정부는 공복제(관료들의 정복), 과거제, 전시과 정비 등을 통해 관료 사회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지방 토착 세력에게 토성(土姓)을 분정하고(몫을 나누어 정함) 그들의 상층을 호장층으로 우대하였다. 또한 각 행정 단위의 읍사(邑司, 개항기 경기도 광명 지역의 향리들이 모여 고을의 사무를 처리하던 통치 기구)를 장악하게 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주고, 한편으로 이들의 이념적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태조 진전(眞殿), 지역 수호신 숭배 사당을 설치하였다.[1]
2. 1. 고려 초기 정치 상황
고려 건국 이후, 중앙 정부는 관료 사회 정비를 위해 공복제(관료들의 정복 제도), 과거제, 전시과 정비 등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토착 세력에게 토성(土姓)을 분정하고(몫을 나누어 정함), 그들 중 상층을 호장층으로 우대하였다. 또한, 각 행정 단위의 읍사(邑司, 개항기 경기도 광명 지역의 향리들이 모여 고을의 사무를 처리하던 통치 기구)를 장악하게 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이념적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태조 진전(眞殿), 지역 수호신 숭배 사당을 설치하였다.[1]삼태사의 후예들은 지방 사회의 주도권과 결속을 더욱 다질 필요성이 높아졌고, 중앙 정부로서도 호족층을 통한 지방 사회 안정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호 필요성에 따라 안동부의 삼태사묘가 성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1]
2. 2. 안동 지역의 특수성
안동 지역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 건국 과정에서 안동 지역 호족 세력의 동향은 큰 영향을 미쳤다.고려 초, 중앙 정부는 관료 사회를 정비하면서 지방 토착 세력에게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고, 호장층(戶長層)으로 우대하여 지방 행정 단위의 읍사(邑司)를 장악하게 했다. 이들에게 실질적인 지배권을 부여하는 한편, 태조진전(太祖眞殿)이나 지역 수호신 숭배 사당을 설치하여 이념적 충성을 유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태사(三太師)의 후예들은 지방 사회의 주도권과 결속을 더욱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중앙 정부 또한 호족층을 통해 지방 사회를 안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호 필요성에 따라 안동부의 태사묘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1]
2. 3. 삼태사묘 건립의 의미
고려 초, 중앙 정부는 관료 사회를 정비하면서 지방 토착 세력에게 토성을 분정하고 호장층으로 우대하며 읍사를 장악하게 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이념적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태조 진전, 지역 수호신 숭배 사당을 설치했다.[1] 삼태사의 후예들은 지방 사회의 주도권과 결속을 더욱 다질 필요성이 높아졌고, 중앙 정부로서도 호족층을 통한 지방 사회 안정화가 필요했다.[1] 이러한 상호 필요성에 따라 안동부의 삼태사묘가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1]3. 병산 전투와 삼태사
930년 고려와 후백제가 고창에서 벌인 병산 전투는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고려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며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1]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고창에 도착하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투항하여 군사와 식량을 지원했다.
병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장정필, 김선평, 권행을 '삼태사(三太師)'라 부르며, 여기서 태사는 정1품 명예직을 뜻한다.[1] 조선 광해군 때 세 성씨 대표들이 합의하여 이들의 위패를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으로 모셨다. 삼한벽상은 940년 신흥사 중건 시 공신당 동서 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을, 삼중대광은 정1품 품계를, 아보공신은 국부의 버금가는 공신 벼슬을 의미한다.[1]
3. 1. 병산 전투의 전개
930년, 고려와 후백제는 교통의 요충지인 고창 지역을 두고 큰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가 바로 병산 전투이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고창에 도착하자, 고창의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들은 군사와 식량을 지원하며 고려군에 큰 힘이 되었다.[1]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를 공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전략을 택했다. 이후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하여 3~4일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결국, 고창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1]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8,000명에 달하는 병사가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며 후삼국 통일의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승리로 인해 안동, 청송 일대의 30여 개 고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1] 후백제는 경상도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이후 충청도 이북의 30여 성마저 고려에 넘어가면서 전라도 지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1]
3. 2. 삼태사의 활약상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시대의 통일에 기여한 삼태사(三太師)는 병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장정필, 김선평, 권행 세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태사(太師)는 고려 시대 정1품 명예직을 뜻한다.[1]- '''장정필''': 원래 이름은 장길(張吉)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포음(圃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훗날 정필(貞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보고의 고손으로, 아버지 장원(張源)은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대장군을 지냈다. 당나라가 혼란해지자 장원은 5살 된 장길을 데리고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장길은 18세에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24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인동의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1] 930년 고창 성주 김선평, 판관 권행과 함께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三韓壁上)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아부공신(亞父功臣)에 녹권되어 태사 및 영운사(領雲社)에 올랐으며, 대상(大相)의 벼슬을 받고 안동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안동 장씨를 본관으로 삼았다. 현재 장정필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다.[1]
- '''김선평''': 신라 효공왕 5년 흥덕궁에서 태어났다. 26세에 고창의 성주가 되었는데, 당시 요충지였던 고창의 성주가 26세의 젊은 나이였다는 점에서 진골, 즉 효공왕의 왕자로 추정된다. 병산 전투에서 권행, 장정필과 함께 견훤을 크게 물리친 공으로 고려 태조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받았다. 현재 김선평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다.[1]
- '''권행''': 원래 신라 왕실 성씨인 경주 김씨였다.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한 사건에 분개하던 중,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다. 병산 전투에서 권행의 공을 크게 여긴 고려 태조는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 즉, "기미(幾微)에 밝고 정세를 밝게 판단하여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라며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창군 별장이었던 권행에게 안동부를 식읍으로 주었다. 또한 권행에게 장정필과 함께 대상(大相) 벼슬을 내렸다. 현재 권행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에 있다.[1]
3. 3. 병산 전투의 역사적 의의
병산 전투중국어는 930년(경순왕 4년) 후삼국 시대 고창군(현재의 안동시)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크게 승리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1]931년 1월, 후백제는 교통 요충지인 고창으로 진격했고, 왕건은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 왕건이 도착하자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백성을 이끌고 투항하여 군량과 병력을 지원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산에서 3~4일간의 전투 끝에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 군사 8,000명이 사망했다.[1]
병산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안동, 청송 등 30여 개 고을이 고려에 투항했고, 후백제는 경상도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충청도 이북의 30여 성도 고려에 귀순하여 후백제는 전라도 지역만 유지하게 되었다.[1]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선평, 권행, 장정필을 '삼태사'라 칭하며 정1품 명예직인 태사(太師) 벼슬을 내렸다.[1]
4. 삼태사의 생애와 가계
930년 고려와 후백제가 고창군(지금의 안동시)에서 벌인 병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선평, 권행, 장정필 세 사람을 삼태사라 부른다. 태사는 정1품 명예직이다.[1] 조선 광해군 때 세 성씨의 대표인 권함, 김태, 장흥효가 합의하여 이들의 위패를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삼한벽상은 940년 신흥사 중건 시 공신당 동서 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을, 삼중대광은 정1품 품계를, 아보공신은 국부의 버금가는 공신 벼슬을 뜻한다.[1]
4. 1. 김선평
신라 효공왕 5년 흥덕궁에서 태어났다. 26세에 고창의 성주가 되었는데, 당시나 지금이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성에 젊은 나이에 성주가 된 것으로 보아 진골 출신, 즉 효공왕의 왕자로 추정된다.[1] 김선평은 권행, 장정필과 함께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고, 이에 왕건은 병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선평에게 대광(정1품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1]4. 2. 권행
권행은 원래 신라 왕실 성씨인 경주 김씨였다. 930년 고창군(지금의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진 병산전투에서,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한 것에 분개하여 태조 왕건을 도와 크게 승리하였다.[3]왕건은 이 공을 크게 여겨 "기미에 밝고 정세를 밝게 판단해 권도에 통달했다"라며 권(權)씨 성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창군 별장이었던 권행에게 안동부를 식읍으로 주었다. 아울러 장정필과 함께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3]
현재 권행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에 있다.[3]
4. 3. 장정필
장정필(張貞弼)은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이며, 자는 영보, 호는 포음, 시호는 충헌이다. 장보고 장군의 고손으로, 아버지 장원(張源)은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대장군을 지냈다. 장원은 당나라가 혼란해지자 5살인 장정필을 데리고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1]장정필은 18세 때 정조사(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에 가던 사신)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까지 알려져 한때 이부상서 벼슬에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다시 귀국하여 경북 인동의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1]
930년 고창에서 성주 김선평, 판관(외직무관으로 5품에서 6품) 김행과 함께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삼한벽상에 책록되고 삼중대광으로 아부공신에 녹권되어 태사 및 영운사에 오르고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받았으며 안동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현재 장정필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다.[1]
5. 안동 태사묘의 구조와 건물
안동 태사묘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곳으로, 여러 건물들이 각기 다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숭보당''': 삼태사의 후손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공간이다.
- '''동재와 서재''': 태사묘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 '''안묘당''': 고창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안금과 안중구를 기리는 사당이다.
- '''사당''':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중심 건물로, 퇴계가 쓴 [삼태사묘 중건기] 비석과 삼태사의 신도비가 묘정(廟庭)에 있다.
- '''보물각''': 삼태사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5. 1. 숭보당
삼태사의 후예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중요한 회합을 갖는 공간이다. 전통시대에 태사묘는 안동 부민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으며, 숭보당은 지역 사림이 모여 문중, 학맥, 당파를 초월하여 향회를 열고 민의를 결정하는 공론의 장이었다. 국난이 있을 때 창의를 하거나 출병을 할 때에도 삼태사묘에 고하였으며, 학봉을 모신 임천서원을 세우기 위한 향중의 모임도 이곳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1]5. 2. 동재와 서재
동재는 태사묘 도유사[1]가 좌정하는 곳이며, 서재는 유사[2]들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 김씨, 권씨, 장씨 문중의 태사묘 관리위원회 겸 안동 화수회의 연락소 역할을 한다.5. 3. 안묘당
이 건물은 두 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첨지[3] 안금이의 사당이고, 다른 하나는 주모였던 노파 안중구를 제사하기 위한 것이다. 사당 처마에는 이 두 사람을 제향하게 된 연유를 기록한 현판이 있다.이에 따르면, 안 노파는 술을 잘 빚기로 이름난 주모였는데, 신라 말 견훤의 군대가 병산에 진을 치고 고창성을 죄고 있을 때 고삼을 넣은 술을 견훤에게 선물하였다. 술이 맛이 좋아 병사들이 독한 줄도 모르고 마셔 모두 취해 곯아떨어졌다. 안 노파는 성주에게 연락하였고, 성주의 지휘 아래 민병은 견훤 군대를 궤멸시키다시피 격퇴하였다. 후손들은 이를 기려 안 노파를 안묘에 봉향하였다.
안금이는 태사묘를 지키는 노복[4]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피신하자 삼태사의 위패를 수습하여 길안의 깊은 골짜기 동굴 속에 숨어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며 지켜왔다. 난이 끝나고 그의 행적에 감격한 향중 인사들은 부사를 통해 나라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면천을 시켜주었고, 향중에서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하던 일을 하고 죽으면 영혼이라도 남아 삼태사가 남긴 밥과 술이나 얻어먹으며 삼태사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소원하였다. 그는 양인이 되고 첨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죽은 후 향중에서는 작은 사당을 지어 그의 위패를 봉인하였다. 그는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삼태사를 모시고, 향사가 있는 날에는 삼태사의 자손들로부터 제사를 받게 되었다.
5. 4. 사당
삼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묘정(廟庭)이 있고, 서쪽에는 퇴계가 쓴 [삼태사묘 중건기(三太師廟 重建記)]를 새긴 큰 돌거북 비석이 있다. 동쪽에는 김선평, 권행, 장정필 삼태사의 신도비(神道碑)가 역시 거대한 돌거북이 받치고 있는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1] 묘당 안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위패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5. 5. 보물각
고려시대에 삼태사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붉은 칠잔 1개, 백옥대, 금대, 여지금대, 오서대, 옥관자 2개, 동인 2개, 갖신 1쌍, 비단 2폭, 공민왕의 친필교지 1점 등이 남아있다. 원래는 옥피리와 상아홀 등 더 많은 유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유실되었다고 한다.6. 안동 태사묘 향사
안동 태사묘 향사는 단순한 제례를 넘어, 고려 건국 공신인 삼태사(三太師)의 정신을 기리고 지역 공동체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행사이다.[1]
향사는 권, 장, 김 세 문중 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 주민과 출향 인사들까지 참여하여 소통하고 화합하는 장을 마련함으로써 지역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1] 이를 통해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결속력을 다진다.
정치인들의 참여는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지역 발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 경쟁이나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6. 1. 향사의 시기와 절차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권, 장, 김 세 씨족이 함께 향사를 지낸다. 중정은 간지에서 한 달에 정(丁)자가 세 번 드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정자가 드는 날을 말한다. 음력 8월의 중정일은 대개 추석을 전후하여 들고, 어떤 때는 추석 당일이 되기도 하여 태사묘를 받드는 유사는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추석 차례를 미루고 태사묘에 입재하기도 한다.[1] 조선 중종 때까지는 안동부의 아문 내에 삼공신묘가 있어서 부사가 헌관이 되어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올렸다. 유교적 의례로 체계를 잡게 되면서 명종 때에는 사정조, 단오, 추석, 동지에 제향하다가, 선조 때부터는 삼성의 의론에 따라 봄과 가을의 중월인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모시고, 헌관은 삼성에서 윤번으로 선임하여 제사를 받들고 있다.[1] 즉, 부민의 제향 대상이었던 것이 후손들에게 맡겨졌고, 현재는 씨족 행사로 치러진다. 그러나 전통 시대 부민의 향사라는 전통을 계속한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매년 춘추향사에서는 안동시에서 일정한 비용이 지급되며, 세 씨족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1]향사 당일 아침 일찍부터 원근에서 모여든 후손들은 각각 자기 씨족의 사무실로 모인다. 이 향사는 주로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족인들이 참석한다. 따라서 안동이라는 향리의 전통과 자부심이 얽힌 행사이다. 가끔씩 대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족인도 오는데, 이들은 대개 취업으로 인하여 최근에 안동을 떠난 '출향인사'로서 안동의 친족과 끊임없는 왕래를 해 오고 있는 사람들이다.[1] 선거철이 되면 정치에 뜻을 둔 인사들이 오거나 찬조금을 내기도 한다. 그런데 세 성씨 중에서 후보자가 되어 경합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의 참례는 부담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인사에 대해서는 헌관이나 집사의 역할을 주지 않는다. 다만 당선이 된 후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태사묘 향사에 인사를 해야 한다.[1]
향사 당일 대개 9시 30분까지 모이게 되는데, 각자 씨족 사무실에 시도록(참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10시쯤에 중앙의 숭보당 대청에 도포를 입고 개좌(開座)를 한다. 세 성씨의 시도록을 펼쳐놓고 고분정(告分定)을 하는데, 초헌관은 일 년 전에 정하였으므로 아헌관과 종헌관은 당일 참석한 사람 중에서 초헌관의 성씨를 제외한 두 성씨 중에서 뽑는다.[1] 이 세 명의 헌관은 매년 돌아가면서 김씨, 장씨, 권씨의 순으로 뽑는다. 나머지 축관 이하 알자, 찬자에서 봉작에 이르기까지 각 역할은 세 성씨에서 각각 한 명씩 내어서 세 명을 한 조로 만든다. 각 역할란에 누가 먼저 기재되는가는 전후의 역할란과 맞추어서 전체가 윤번제가 되도록 순차적으로 배려하며, 또한 매년 이를 윤번제로 한다.[1]
제의는 서원의 향사와 차례와 내용이 동일하다. 태사묘의 세 문 앞에는 세 개의 술 항아리와 국자가 놓이고, 각 항아리에 두 명의 사준(司樽)이 서 있다. 헌관은 찬인(贊引)의 인도를 받아 동쪽 계단을 통하여 올라와서 세수를 한 후 사당으로 들어온다. 삼태사의 각 위에는 두 명의 집사가 배정되어 있어서, 헌관이 사당의 중앙에 앉아서 헌작(獻爵)을 하면 집사가 각각의 신위에 동시에 올린다.[1] 신위는 동쪽을 필두로 하여 김태사, 권태사, 장태사의 순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으로 어느 편이 상석인가는 따지지 않는다. 축관은 세 명으로서 각각의 신위 앞에서 앉아 동시에 축을 읽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 신위의 위차 문제는 없어지고 평등함을 뜻함으로써 세 성씨, 특히 김씨와 권씨 사이의 논쟁이 없어진다.[1] 초헌관이 사당의 서문 쪽으로 나와서 서쪽 축대 끝에 앉아서 삼태사의 각 위에서 내리는 술을 마시는 향음례(享飮禮)를 하고 들어가면, 축대 아래 서쪽 귀퉁이에서 분축(焚祝)을 한다. 이로써 정식 제의는 끝이 나는데, 헌관, 축관, 제 집사들이 차례로 다시 삼태사 묘 앞에서 재배를 하고 떠나면 나머지 일반 참례자들도 재배를 한다.[1] 향사가 끝나면 참례자들은 사당으로 들어가서 차린 제수를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또한 묘정에서 사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는다.[1]
한편으론 태사묘 사당의 신문 밖 서쪽에 있는 안묘당(安廟堂)에 작헌하고 독축하는 준향례(準享禮)를 행한다. 안묘당은 옛적 태사공이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을 이룰 때 후백제 견훤에게 고삼주(苦蔘酒)를 먹여 태사군을 도운 주모 안중구(安仲具)와, 임진왜란 때 삼태사의 위판을 지고 피란한 안갑이(安甲伊)를 모신 사당이며, 준향은 태사공께 올려 쓴 제물을 내려다 음복향(飮福享)으로 올리는 제사이다.[1] 여기에서 안중구의 묘실에는 위패가 없고 벽에 백마도만 그려져 있으며, 술과 희생(犧牲)을 쓰지 않고 독축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갑이의 묘실에는 위패가 있고 태사공 향사에 썼던 희생과 술을 올리며 독축도 한다.[1]
도유사(都有司)를 비롯한 헌관과 유사들이 정면과 측면에 좌정하고 나머지 참례자들이 몇 겹씩 사방을 에워싸고 적당히 자리를 잡으면, 집사는 세 명의 헌관에게 일일이 주저앉은 자세로 "혹시 (의례 과정에서) 실례가 없었습니까?" 하고 묻고, 헌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서 만족함을 나타낸다. 집례(執禮)는 이에 향음례를 선포하면 각자에게 독상으로 술과 포를 담아 내놓는다. '초헌관 행 향음례' 하고 집례가 부르면 모두들 초헌관을 따라서 술잔을 두 손으로 이마까지 올렸다가 마신다. 이를 아헌관과 종헌관의 향음 순으로 되풀이한다.[1] 향음례가 끝나면 참례자 전원이 비빔밥을 먹지만, 그 전에 유사의 주관으로 총회를 개최한다. 지난 한 해의 재정보고와 앞으로의 예산 및 행사, 그리고 소 운영에 관계된 안건이 토의되거나 공지사항이 전달된다.[1] 참례자들이 각 성씨의 사무실이 있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숭보당 앞뜰에 친 차일 아래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겸한 음복을 하는 동안, 도유사와 세 성씨를 대표하는 유사들은 숭보당의 재장실에서 내년도 도유사를 논의하여 그를 초청하는 망기(望記)를 작성한다.[1]
6. 2. 향사의 참여와 의미
안동 태사묘의 향사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권씨, 장씨, 김씨 세 문중이 함께 지낸다.[1] 조선 명종 때 유교식 제례가 정착되었고, 선조 때부터 춘추 중월인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모시고 있다.[1] 헌관은 세 성씨가 윤번제로 맡는다.[1]안동 지역 주민들은 향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는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1] 안동 출신 인사들은 향사를 통해 고향과의 유대를 확인하고,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를 다짐한다.[1]
향사에는 정치인들도 참여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진다.[1] 당선된 정치인은 어떤 형태로든 태사묘 향사에 인사를 해야 한다.[1]
향사 당일에는 세 성씨의 후손들이 모여 시도록에 이름을 올리고, 헌관, 축관, 집사 등을 선정하여 제례를 진행한다.[1] 제례는 서원의 향사와 유사하며, 삼태사의 위차 문제는 평등하게 처리한다.[1] 제례 후에는 안묘당에 준향례를 행하고, 참례자들은 음복례와 총회에 참여한다.[1]
이러한 향사 참여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안동 지역 사회에서는 태사묘 향사가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세대 간 소통을 증진하는 역할을 한다.
6. 3. 준향례
안묘당에서 별도로 진행되는 준향례는 옛적 태사공이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을 이룰 때 후백제 견훤에게 고삼주를 먹여 태사군을 도운 주모 안중구와, 임진왜란 때 삼태사의 위판을 지고 피란한 안갑이를 모신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준향은 태사공께 올렸던 제물을 내려 음복으로 올리는 제사이다.[1]안중구의 묘실에는 위패가 없고 벽에 백마도만 그려져 있으며, 술과 희생을 쓰지 않고 독축도 하지 않는다. 반면 안갑이의 묘실에는 위패가 있고, 태사공 향사에 썼던 희생과 술을 올리며 독축도 한다.[1]
6. 4. 총회와 음복
안동 태사묘의 향사가 끝난 후에는 참례자들이 모여 총회와 음복례를 진행한다. 총회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재정 보고, 앞으로의 예산 및 행사, 그리고 태사묘 운영과 관련된 안건들을 논의하고 공지사항을 전달한다.총회에서는 다음 해 도유사를 선출하는 절차도 진행된다. 도유사와 권씨, 장씨, 김씨 세 성씨의 대표 유사들은 숭보당 재장실에 모여 다음 해 도유사를 논의하고, 선정된 도유사를 초청하는 망기를 작성한다.
음복례는 집례가 "초헌관 행 향음례"를 선포하면서 시작된다. 참례자들은 초헌관을 따라서 술잔을 이마까지 올렸다가 마시는 의식을 아헌관, 종헌관 순서로 반복한다. 향음례가 끝나면 참례자들은 모두 비빔밥으로 음복을 하는데, 이와 함께 유사의 주관으로 총회가 진행된다.
참조
[1]
문서
조선 시대 향교. 서원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교육을 담당한 사람
[2]
문서
전통사회의 향교, 서원, 이정 등과 필요에 의해 구성된 자생적 모임, 즉 동계 혼상계, 갑계, 수리계, 두레 등의 각종 계모임, 그리고 어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일시적인 성격의 집회 등에서 경리, 연락, 문서작성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3]
문서
본래 노비였으나 후에 면천되었다.
[4]
문서
늙은 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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